★이모저모
기차타고 MT는 옛말
약수터
2008. 2. 20. 03:30
기차타고 MT는 옛말…‘외톨이 대학생’이 느는 이유
2008년

취업난과 더불어 1994년 도입된 대학 학부제 때문에 '외톨이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 대학가에서 나오고 있다.
전공에 관계없이 다양한 학과 지망생들이 모여 지내는 1, 2년간은 '반'에서, 전공이 정해진 뒤에는 뿔뿔이 흩어져 2, 3년간 '과'에서 지내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시간과 공간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
또 갈수록 취업난이 가중됨에 따라 학교 내에서도 경쟁이 심해져 '청량리에서 기차타고 대성리로 MT 가는' 모습은 옛 추억이 돼 가고 있다.
●"외교학과생이 왜 경제반?"
S대 06학번 A씨(21).
그는 대학 입학당시 외교학과에 가고 싶어 사회과학대학에 지원해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런데 막상 입학해 보니 그는 '외교반'이 아닌 '경제반' 소속이었다.
"외교학을 하려는데 내가 왜 경제반이냐"고 묻자 조교들은 "학부는 학과 배정을 받기 전 1년 동안 임시로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외교학과 지망생들이라도 경제반 사회반 언론반 등 다양한 학부에 전공과 관계없이 무작위로 배속된다"고 대답했다.
'학부제'와 '소속반'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A씨는 '경제반에 들어가서 외교학과로 진학하지 못하면 어떡하나'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1994년 도입된 학부제는 과거 학과 별로 신입생을 선발하던 방식이 아닌 공통 계열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는 학사행정제도.
가령 신입생은 '국어국문학'가 아닌 '인문대학'에서 인문대 공통 과목을 공부하면서 각 학과에 대한 기초 정보를 얻은 뒤 2, 3학년 때 '국어국문과' 등 자신의 전공을 선택하는 식이다.
선발은 대학별로 차이가 있지만 주로 원하는 학과에 3~5지망까지 지원을 한 뒤 정원에 맞춰 학점 순으로 뽑는다.
학점이 좋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전공은 외교학, 선배는 경제학, 담당교수는 심리학
A씨는 1년 동안 경제반에서 생활하면서 소속반(경제반)과 희망전공(외교학과)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는 A씨에겐 큰 부담이었다.
경제반에서는 외교학과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반 선배들은 경제학과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같은 반 출신 외교학과 선배를 찾으려 했으나 선배들은 전공 선택 후에는 독서토론회, 세미나 등 반에서 이뤄지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담당 교수는 심리학과였다.
결국 A씨는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전공 설명회에 참석한 뒤 그곳에서 얻은 정보만으로 외교학과에 지망해 합격했다.
●"학부 때 친했던 애들 모두 다른 과"
A씨는 원하던 전공을 꿰차는 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A씨와 함께 외교학과를 지망했던 같은 반 소속 친한 친구가 불합격해 사회학과로 가게 된 것.
의지할 친구가 사라진 A씨는 전학 온 학생의 심정으로 첫 학기 시간표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짜야했다.
A씨는 혼자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도 혼자 공부했다.
외로웠다.
외톨이가 된 것 같아 우울했지만 다른 학생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A씨를 비롯한 2학년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학년 때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과가 정해진 뒤로는 각자 시간표가 달라 반 친구들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전공 첫 학기. 공부도 생소해서 원하는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도 많이 해야 했다.
때문에 시간이 난다고 해도 한가롭게 놀 시간은 없다.
그렇게 반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친구보단 학점"
언론정보학과 05학번 K씨(22·여·4학년)는 "A씨의 고민은 모든 2학년한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K씨도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가득 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같은 과 친구들의 얼굴을 잘 모른다.
1학년 학부 시절에는 반방이나 학생회 등에서 쉽게 동기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전공이 정해진 다음부터는 같은 과 학생끼리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예 없었다.
또 1학년 때 '새내기' 기분에 친구 사귀기에 열중했던 동기들이 2학년부터는 본격적인 학점 따기에 몰두하면서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모이지 않았다.
K씨는 "같은 반 출신 친구와 지금도 단짝으로 지내며 함께 시간표도 짜고 수업도 듣지만 그 동안 새 친구는 거의 못 사귀었다"고 말했다.
조모임이 있는 수업이라면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과제가 끝난 뒤에도 연락을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
K씨는 과대표가 돼 MT와 점심모임, 동아리 모임 등에 적극적으로 동기들을 초대했지만 참여율이 워낙 저조해 이제는 포기했다.
●"졸업반 되니 취업걱정…눈에 뵈는 거 없어"
이 과 조교 C씨(24·03학번)는 "단합을 위해 MT를 계획하고 과 사무실에 비치된 연락처를 통해 학생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50% 정도 밖에 안 오고 이 중 20% 정도는 불참한다는 거절 문자"라고 말했다.
C씨는 "막상 MT에 가도 분위기가 어색하기 때문에 '집안 일' '선약' 등을 핑계로 그 시간에 전공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생명공학과 졸업반인 P씨(25·여)도 "그동안 MT나 과 모임에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친구라고 할만한 동료도 2, 3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학부에서 학과로 넘어오는 시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2학년부터는 전공과 취업준비에 몰두하느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2, 3학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된 뒤에는 과에서 인간관계 만들기를 아예 포기했다"는 게 P씨의 얘기.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4학년이 되니까 같은 과 동료들이 '친구'로 안 보이고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력이 우선"… "인간관계가 중요"…, 논란
학부제를 경험한 졸업생 및 현재 재학생 사이에서는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시각과 "'인맥'이 느슨해져 사회에 진출한 뒤 불리하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02학번 전재호(25)씨는 "1학년 때 반 동기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 놓은 결과 지금도 대학 때 친구가 많다"며 "학부제 하에서도 얼마든지 실력과 인간관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졸업생 김경재(26)씨는 "현행 학부제에서는 인간관계를 넓히기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며 "사회생활에는 학점 못지않게 인간관계도 중요한 만큼 졸업생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